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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야기

사적 단양 수양개 유적 [단양군]

작성자 전체관리자  조회수 618 등록일 2020-10-22

  수양개 I지구에 대한 발굴은 1983-1985년에 충주댐 수몰지역 유적조사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발굴결과 석기류가 발견되었고, 중기 구석기시대유적으로 알려졌다. 구석기유적 주변에서는 약 5천년전 신석기시대와 약 3천년 전 청동기시대 유물도 산재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I지구의 2단구는 해 발 130m를 기준으로 발달된 자갈층에 있는데, 이 자갈층의 1m깊이에서 긴 구덩으로 확인된 중기 구석기층(V층)은 사암과 같은 굵은 입자의 자갈돌을 돌감으로 이용하여 직접떼기로 만든 긁개·찌르개·주먹대패 등과 같은 다목적 석기가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 문화층(IV층 :18,630bp·16,400bp)은 찰흙층으로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가운데 단일 면적으로 가장 큰 발굴유적(1,250㎡)으로 진행되어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돌감은 90%이상이 셰일 모난돌이 이용되었는데, 이 돌(석재)들은 수양개유적에서 약 1.5km 떨어진 산제골에서 날라다가 직접떼기와 돌날떼기·눌러떼기와 같은 간접떼기로 사용하여 석기를 제작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50군데의 석기제작소를 중심으로 석기를 만들었음이 발굴 결과로 밝혀졌다.

 

     

 

  모룻돌을 중심으로 하여(석제에서 서기를 만들기 위하여 떼어낸 돌 조각)들 가운데 “점돌”이라고 불리워지는 142점 가운데 18점이 부합되어 석기 제작행위를 알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직접떼기가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석기 가운데에는 다양한 형식의 주먹도끼와 전형적인 찍개도 있으나 특히 숨베찌르개와 좀돌날이 매우 특징적인 유물로 해석된다. 슴베찌르개는 일본 규슈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또 일정한 범위 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수양개 Ⅱ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5년과 1996년에 유적지보다 약간 더 하류쪽에서실시되었고. 이곳에서 삼한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확인되었다. 주발굴지는 중앙선 구질도 남쪽하안을 대상으로 하였다. 발굴당시 트랜치는 기반암까지 내려가지 못하였으며. 약 1m 이상 파내려 간 트랜치에 의하면 세립질 모래층이 주를 이루며. 모래층사이사이에 이질층이 협재(快在)해 있다. 주변의 하안 퇴적층은 세립질 모래층이 흔하며, 집터와 같은 주거지는 국세립질 모래층과 가는 띠 모양을 이루는 이질층이 많이 끼어 있다. 취락유적으로 집터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집터는 세립질 모래층 위에 움을 파고 집을 지었으며, 화재로 인해 파괴된 후, 강물에 의해 유구가 매몰되어 형성된 지층으로 해석된 바 있다.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건립을 위한 사전조사로 실시된 8차 조사에서 확인된 Ⅲ지구는 해발 165-170m에 발달한 고기(占期) 3단구에 형성(약 30만년 전)된 전기 구석기문화층이 발굴되었다. 두께 7m 이상의 자갈층에서 확인된 석기는 주먹대패·사냥돌 등이 있으나 시굴 성격상 조사의 넓은 면적을 발굴하지 못하여 전체성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의 건립지를 시굴 조사한 Ⅱ지구에서는 이른 3단구 또는 4단구에 발달된 석기문화층을 찾아서 적어도 30만년 이전의 문화특징을 찾게 되어 수양개 구석기문화의 편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좀돌날 몸돌은 제작수법으로 보아 크게 I·Ⅱ·Ⅲ형식으로 구분되는데 Ⅱ형식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좀돌날 몸돌에 관한 연 구결과 공주 석장리에서 영향을 받아 좀돌날 몸돌의 제작기술을 발달시켜, 한 줄기는 남쪽의 전남 승주 곡천, 화순 대전에서 일본 큐슈로, 또 한 줄기는 북쪽의 평양 만달리를 거쳐 선봉 굴포리 우스티노브카(사할린) 일본 홋카이도에로의 전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연모 이외에 이 유적의 중요성을 더하여 주는 것은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들이다. 여러 곳에서 많은 격지가 그대로 발굴되어, 돌망치·모룻돌 등과 같이 석기제작행위의 복원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행위의 중심지는 적어도 50군데이상이 유적에 넓게 펼쳐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식량채집사냥에 따른 자료 이외에 첫소의 정강이뼈에 ‘물고기모양’을 새긴 예술품(8.2×3. 5cm)이 발굴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줄새김 예술품으로 유일한 자료인데, 당시 사람들의 사냥대상물에 관한 풍요기원이나 주술예술의 표현으로 보여 당시 문화해석과 복원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양개유적은 유물의 종류제작수법 및 유물 수에서 국내 최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지로서 우리나라 선사유적의 교육장으로 활용가치가 크다.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1, 『단양 수양개 유적 종합정비계획수립연구』. 일부 내용 발췌

1983 사적 398 단양 수양개 유적 [1지구 전경2] [문화재대관] 단양군.jpg [497.1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