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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야기

사적 증평 추성산성 [증평군]

작성자 전체관리자  조회수 1,156 등록일 2021-10-21

  1997년 충청대학교 박물관이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산성의 현황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중요한 산성유적으로 판단되어 2004년 4월 30일 증평군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된 이후, 2006년 12월 15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충청북도와 증평군에서는 이성산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향후 이성산성의 체계적인 관리와 보호, 국가 사적지정의 기초자료를 확보고하기 위하여 이성산성의 성벽과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발굴조사를 계획하였다. 2009년 1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남성에 대하여 모두 7차에 걸친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증평 추성산성의 항공사진과 표고분석]


  2009년 1차 발굴조사는 먼저 남성 외성의 가장 낮은 지점에 설치된 시설물에 해당되는 남문지와 주변 성벽에 대하여 2009년 6월 17일부터 9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남성 외성 남문지의 성격과 주거지 2기, 석곽유구 1기, 부석유구 1기, 남성 외곽에서 옹관묘 1기가 확인되었다. 그 중 남문지는 남성 외성 내에서 발생되는 모든 유수가 집중되는 계곡에 위치하며, 성의 주요 통행로와 수문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삼국시대 토축산성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최초의 사례이다. 

  2010년 2차 발굴조사는 남성의 외성 남문지 내측 평탄지의 집수시설 유무와 함께 성벽의 축조기법을 확인하기 위하여 2010년 12월 27일~2011년 5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조사 남성 외성 내 평탄지의 시굴조사와 성벽 절개조사가 병행되었다. 조사결과 남성 내 평탄지에서 도수로 및 주거지와 소성유구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조사는 외성 서벽과 남벽, 내성 동벽과 북·동벽 회절부, 북벽, 남벽 2개소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기존에 알려진 토축산성 성벽 축조방식과는 다른 축조공정을 밝혀냈다. 외성 서벽과 남벽, 내성 동벽, 북·동벽 회절부 성벽은 외측 하단부에 단면 반원형의 토루를 축조하여 여기에 의지하여 1~2개의 작은 토루를 덧붙여 성벽의 규모를 크게 하는 공정이 확인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1년 3차 발굴조사는 2차 발굴조사 결과 남성 내성의 북·동벽 회절부 성벽과 동쪽 성벽 및 외성 평탄지에 대한 추가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2011년 8월 24일~2011년 12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내성 평탄지에서는 1차 조사에서 확인된 남문지와 연결되는 4기의 도수로와 주거지 2기, 소성유구 1기, 온돌시설 1기가 확인되었다. 

 

  

[2009~2011년 남성 외성 남문지 발굴조사]


  2012년 발굴조사는 추성산성 북성의 내성과 외성의 5지점에 대한 절개조사를 통해 토축성벽의 축성방식을 밝혔다. 그리고 내성 평탄지에서는 한성 백제시기 토축산성의 문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남문지와 토축성벽을 관통하는 석재 배수로, 원삼국~한성백제시대 주거지 5기를 조사하였다. 1호·4호·5호 주거지들은 내성 성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3호 주거지는 4호 주거지 상면의 성벽 조성층을 굴착하여 축조되었기에 내성 성벽의 선후 관계를 밝힐 수 있었다. 북성은 남성보다 약간 늦은 4세기 중후엽경에 축조되었고, 남성과 같은 5세기 전반 이후에 활용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으로 주거지에는 화재로 불탄 유물의 상태가 양호하게 잔존하고 있어, 내성 성벽의 축조와 활용시기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었다. 또한 가야지역 및 서해안과 영산강 유역의 토기 등이 확인되고 있어 한성백제가 추성산성을 중심으로 이들 지역과 교류한 사실과 더불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2012년 북성 내성 동벽 및 내성 남문지 일원 발굴조사]

 

  2014년 발굴조사는 추성산성에 대한 다섯 번째 발굴조사이며, 북성으로서는 두 번째 조사이다. 조사는 북성의 내성과 자성 1·2의 성벽 축조 관계 및 축성 시기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향후 유적 보존·정비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조사지역은 북성 내성의 서벽에서 자성 1의 북벽이 이어지는 연접부와 자성 1, 자성 2의 성내 평탄지를 포함한 곳으로 1,840㎡의 범위이다. 현장조사는 먼저 북성의 자성 1 · 2 성벽과 내부 평탄지를 중심으로 한 1,628㎡의 범위에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자성 1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를 중심으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정밀 발굴조사는 자성 1의 성벽과 성내 평탄지를 포함한 674㎡를 중심으로 성 내측의 유구가 연결되는 212㎡의 범위를 확대하여 총 886㎡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번 조사를 통해 북성 내성과 자성 1의 성벽은 인공적인 토루를 서로 연결하여 축조하지는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자성 1의 성내 평탄지를 둘러싼 북벽과 남벽에서는 성토하여 조성한 토루와 성벽을 따라 배치된 주공열 등이 조사되었다. 따라서 비록 내성과 토루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자성 1 지역에 인공적인 성벽을 축조한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성벽의 기본적인 축조 방식은 그간 조사된 남성과 북성 내성 성벽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자성 1 북벽과 내성 서벽 사이 인공적 성벽을 축조하지 않은 구간으로 성내외의 통행이 이루어진 양상이 확인된다.

 

  

[2014년 북성 (시)발굴조사과 북성 자성 1 북벽 내측 1~3호 온돌 시설 모습]

 

  2015년 발굴조사는 추성산성에 대한 여섯 번째 발굴조사이며, 남성으로서는 네 번째 조사이다. 금번 발굴조사는 남성 내성의 남서 회절부와 외성 서벽 연접부 그리고 내성 남벽 내측의 평탄지를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추성산성 남성의 내성과 외성 성벽의 축조 관계 및 구조, 축성 시기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향후 유적 보존·정비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현장조사는 2015년 6월 12일부터 12월 22일까지 4,446㎡ 면적에 대해 실조사일수 99일간의 일정으로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남성 내성의 남서 회절부와 외성 서벽의 구조, 내성과 외성 성벽 사이 어긋문 형태로 조성한 성문(서문), 내성 남서 회절부 상면의 망대 시설, 내성 남벽의 축조 방식, 내성 남벽 내측 평탄지의 후대 건물지와 선대 수혈 주거지, 후대 석곽묘 등을 확인하였다. 증평 추성산성 남성의 내성과 외성의 연접부를 이루는 산성 서쪽 부분은 당초 자연 지형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여 내성과 외성 성벽이 서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금번 조사를 통해, 초축 당시 내성과 외성은 분리되었고 이 부분을 성문(서문)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즉, 추성산성 남성 축조 당시 성의 서쪽 부분 내외성의 연접부에는 성 내외로의 출입을 위한 어긋문 형태의 성문을 개설한 것이다. 그리고 구지표층이 각 성벽의 상면을 따라 동일면을 이루며 형성되었기 때문에 내성과 외성은 동시에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문에서 확인되는 토층 양상을 통해 후대에 인위적으로 매몰한 후 이를 폐쇄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외성과 내성의 성벽을 서로 연접시킨 것으로 파악된다.

 

  

[2015년 남성 내성 발굴조사]

 

  2016년 발굴조사는 추성산성의 남성 내성의 북향 계곡부와 동향 계곡부 일대의 성내와 성벽 및 성밖의 배수시설 등에 대하여 실시하였다. 이 구간의 성벽은 북향 계곡부는 기저 다짐층 상면을 단면 타원형 형태로 조성하여 하부에서부터 쌓아 올린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동향 계곡부는 기저 다짐층을 수평으로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그위 토루(土壘) 조성층에 반원형의 토제(土堤)를 조성한 후에 그 사이에 수평 다짐 하듯이 쌓아 올려 구간별 차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성 밖 배수시설은 석재로 축조하여 3차례 수축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초 축조한 배수시설은 다짐층을‘ 凹’자형으로 정지하여 양쪽 벽에 석축을 조성한 구조로 폭은 약 140cm 정도이고, 4~5단 정도로 쌓아올려 높이 약 60~80cm 정도이다. 이 석축이 붕괴된 이후 수축한 배수시설은 당초 배수시설의 남쪽벽이 붕괴되어 다시 축조하였고, 당초 배수시설의 북쪽벽을 재사용하였고, 무너진 남쪽벽에 석재를 덧대어 폭이 60cm 정도로 축소되었다(2차 배수시설). 상층에 마지막으로 수축된 배수시설은 암거(暗渠) 형태로 입면이 방형으로 폭 35~40cm × 높이 40cm 정도의 크기이며, 바닥은 석재를 깔았다.(3차 배수시설)

  조사지역 북향 계곡부의 성내 대지조성층 상면에서 석축 우물 1기·수혈유구 1기·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성벽과 성밖에서 배수시설이 확인되었지만 붕괴되어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동향 계곡부의 성내 대지조성층에서 수혈주거지 3기·수혈유구 1기·성내 배수유도석렬(排水誘導石列) 2기·배수유도석축(排水誘導石築) 등이 확인되었고, 성밖으로 이어지는 석축으로 된 배수시설은 3차에 걸쳐 수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이 지역 성내에서 폐성된 이후에 조성된 고려초기 석곽묘 3기가 확인되었다. 

 

  

[2016년 남성 계곡부 배수시설·우물·성내2호석곽묘 발굴조사]


  추성산성이 폐성된 이후에 고려초기에 조성된 석곽묘는 북향 계곡부 성안에서 1기, 동향 계곡부 성안에서 2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 동향 계곡부 2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청자 발(鉢)과 토기편병(土器扁甁)은 10세기 중반에서 11세기 초반으로 편년된다. 이들 석곽묘는 지난 6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2기와 증평군 일대의 석곽묘들과 비교해 보면 축조방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2016년 추성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의 시기는 대략 3~5세기로 편년되며, 특히 1~3호 주거지 출토 유물은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된다. 그리고 석곽묘에서 출토된 청자발과 편병은 10세기 중반에서 11세기 초반에 유행한 것들이다. 이는 추성산성이 4세기 중엽 이후에 초축된 이후 5세기 경까지 운영되다가 폐성되었으며, 이후 고려초기에 석곽묘가 들어섰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원문화재연구원, 2013, 『증평 이성산성3-남성1,2,3차-발굴조사 종합보고서』, 가연. 일부 내용 발췌
중원문화재연구원, 2014, 『증평 추성산성 4차(북성 1차) 발굴조사 보고서』, 가연. 일부 내용 발췌
중원문화재연구원, 2016, 『증평 추성산성 5차(북성 2차) 발굴조사 보고서』, 현대옵셋인쇄사. 일부 내용 발췌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6, 『증평 추성산성 종합정비사업 학술연구』, 돋움. 일부 내용 발췌
중원문화재연구원, 2017, 『증평 추성산성 6차(남성 4차) 발굴조사』, 현대옵셋인쇄사. 일부 내용 발췌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9, 『증평 추성산성 7차발굴조사 보고서』, 일광. 일부 내용 발췌

사적 527 증평 추성산성.jpg [234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