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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야기

충북 기념물 옥천 육영수 생가 [옥천군]

작성자 전체관리자  조회수 1,195 등록일 2021-10-21

  육영수 생가는 1894년경에 건축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가옥으로 건축면적은 595㎡, 대지가 6,407㎡, 전답은 28,646㎡의 규모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흔히 ‘교동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이 집은 1600년대의 김정승, 송정승, 민정승이 살아서 ‘삼정승집’이라고 전하는 고가로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생가는 서울 비원의 연경당에 비유될 정도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건축규모를 갖추고 있던 곳으로 1920년대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인 민대감에게서 구입하였다고 전하며, 구입 당시 사랑채, 내당, 사당, 별당 등이 팔작지붕의 형태를 지닌 가옥으로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생가는 조선시대 후기 충청도 반가의 전형적인 양식이었으나, 1969년에 현대건설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보수, 단장을 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생가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반가의 건축양시기었으므로 고건축학상으로 연구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육영수 여사의 넋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는 생가터이다. 이에 옥천군에서는 육영수 여사 생가터를 사적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추진하면서 충청대학 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2005년 6월 7일부터 2005년 6월 30일까지 안채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건물지 내부에서 1차 건물의 온돌시설 일부가 확인되었다. 

 

  

[2005년 발굴조사지역과 고래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2006년 7월 13일∼2006년 12월 15일까지 실조사일수 발굴(시굴) 30일, 발굴 60일 등 총 90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조사결과 확인된 유구는 건물지 3기와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은 건물지 1기 등 4기(1기는 훼손되어 없음)와 수혈유구 2기 등이 조사되었다.

 

   

[2006년 1~3호 건물지 발굴조사]

 

  

[2006년 4호 건물지 및 수혈유구 발굴조사]


  옥천 故육영수여사 생가지 유적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항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가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모두 4개동이 조사되었는데, 1개동은 이미 훼손된 것을 확인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생가의 내력을 참조하여 조사한 금번 발굴조사에서는 1970년대에 건물을 신축(복원)으로 이전 건물지가 상당부분 훼손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구입 당시 혹은 이전으로 생각되는 건물지의 흔적이 일부나마 남아 있어 이 시기의 건물지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근현대의 적심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데 그 의의를 가질 수 있겠다. 금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건물지의 형태와 출토유물로 살펴볼 때 조선후기 혹은 일제강점기(1920년대)에 개축 혹은 증축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출토된 유물 중 철제전골냄비는 사료를 통하여 그 용도를 알 수 있는 유물로 사료와 실제 유물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유물로 생각되며, 유리판, 유리잉크병, 사기접시 등은 일제강점기에서 근현대까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복원된 옥천 육영수 생가 모습]

 

충청대박물관, 2005, 『옥천 육영수 생가지 1차 발굴조사 보고서』. 일부 내용 발췌
중원문화재연구원, 2008, 『옥천 고육영수여사 생가지 시발굴조사 보고서』. 일부 내용 발췌

2006 기념 123 옥천 육영수 생가 [1호 건물지(위채) 항공촬영] [옥천 고육영수여사 생가지 시발굴조사 보고서] 중원문화재연구원.JPG [874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