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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이야기

사적 괴산 미륵산성 [괴산군]

작성자 전체관리자  조회수 1,120 등록일 2021-10-22

  괴산군은 미륵산성에 대하여 정비⋅보수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추진에 앞서 자료 확보를 위한 발굴조사를 계획하였으며, 우선 서문지 주변의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였다. 발굴조사는 2010년 2월 26일 문화재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총 2회에 걸쳐 진행하였다. 1차 조사는 2010년 9월 6일에서 2010년 12월 12일까지 실시하였으며, 2차 조사는 2011년 4월 22일~6월 20일(실조사일수 32일)까지 실시되었다.

  이번 조사지역은 북위 36°38′51.81″,동경 127°49′04.31″로 미륵산성 서문지 일원으로 미륵산성의 정비 및 보수작업에 앞서 서문지 주변의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2차에 거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미륵산성 서문지 주변에서는 성벽과 성내에 연접하여 축조된 집수조, 집수조에서 성벽을 통과하여 밖으로 연결되는 수구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잔존높이 5.6m 내외로 횡단면이 계단상을 이루며 성벽의 위쪽으로는 담장시설을 설치하고 그 안쪽으로 통행로를 두고 다시 계단상으로 내려가는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성벽 안쪽으로는 성 내벽과 맛대어 집수조가 축조된 독특한 형식이다.

 

[서문지 일원 평단면 실측도]

 

  집수조는 계곡부의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하며 집수조의 장축방향은 성벽과 직교한다. 집수조의 북벽은 석축으로 쌓아 물을 가두어 음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계곡부에 위치한 문지 추정지에 대한 물 흐름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구는 성벽 하단부에 축조되었으며, 집수조 바닥에서 약 1m 높이의 공간을 두고 축조되었다. 이를 통해 일정량의 물이 집수조에 모였을 때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수구와 성벽을 가로질러 연결되는 출수구는 수구의 크기가 60cm 내외의 방형으로 확인되었으며, 바닥에 설석(舌石)을 놓아 배출되는 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였다.

 

   

[서문추정지 및 출수구]

 

  그리고 미륵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유물인 청해파문 기와편과 순백자편 등도 있다. 따라서 미륵산성은 고려말기 왜구가 내륙으로 침입하여 극성을 부리던 때에도 입보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응급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크게 개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미륵산성은 고려후기 몽고침입기에 축조되어 크게 개수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면서 조선시대 까지 어느 정도 보완되어 기능이 유지되다가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추정지 주변 초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3, 『괴산 미륵산성 서문지 주변 발굴조사 보고서』. 일부 내용 발췌

2016-05-17 사적 401 괴산 미륵산성 [산성12] [문회재대관]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디자인씨).jpg [1,131.2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