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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 적성비
국가지정 >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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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丹陽 新羅 赤城碑
영문명 Jeokseongbi Monument of Silla, Danyang
지정일/등록일 1979-05-22
관할시군 단양군
이칭/별칭 국보 198

문화재 설명정보

단양 신라 적성비는 단양군 단성면 적성(赤城) 내에 위치하고 있는 척경비이다.
1978년 1월 6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 되었으며, 표면이 위를 향하고 뿌리가 북쪽을 향해 30㎝ 정도가 땅 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적성비는 높이 93㎝, 폭 107㎝, 두께 25㎝의 크기로,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고 얇아지는 모양이다. 자연석을 치석(治石)하여 사용하였으며, 윗부분은 잘려나갔으나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의 곱고 판판한 면에 새겼는데, 얕게 음각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字劃)이 생생하다. 전체 글자 수는 430자 정도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이며, 이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284자이다. 문장은 순수 한문식이 아닌 신라식 이두문(吏讀文)과 한문이 섞여 있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체(楷書體)이나 예서풍(隸書風)이 남아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맞추어 새겼다.
적성비의 건립연대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의 1행 상단부는 파괴되어 정확한 비의 건립연도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위 관등(官等)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545∼550년(진흥왕 6∼11) 또는 적성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인 551년 직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적성을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이후 이사부지(伊史夫智, 이사부)를 비롯한 대중(大衆)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등이 회의를 열어 공을 세운 현지인들에게 포상하기로 결정하고, 왕명(王命)의 형식으로 현지인이었던 야이차(也尔次) 등에게 전사법(佃舍法)에 의거하여 포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노역체제와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 신라의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성비의 발견은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 다수 발견되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대중등(大衆等)·군주(軍主)·당주(幢主)·사인(使人) 등의 명칭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및 촌락의 양상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국법(國法)·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소자(小子)·소녀(小女)·여자(女子)와 같은 용어를 통해 율령(律令)과 조세제도 등 신라 사회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단양 지역은 신라의 북방 공략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에 비를 건립한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고함을 다지고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회유흡수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단양 적성비의 발견은 신라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의미가 크며, 4기의 순수비(巡狩碑;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함께 척경비(拓境碑)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Located in Jeokseong Fortress of Danseong-myeon, Danyang-gun, this stone monument of Silla was excavated by a team from Dankook University on January 6, 1978. At the time of its discovery the stele lay buried about thirty centimeters in the ground, with its main face turned upwards and its base facing northwards.
The area around present-day Danyang was a crucial strategic point for Silla’s northward advance. As such, the existence of the stele in this area can be interpreted as a symbol of Silla’s determination to defend its newly-won territory by assimilating the people of Goguryeo after bringing the dynasty under its control.
The excavation of the Jeokseongbi Monument resulted in the discovery of facts that are not recorded in any existing historical documents, thus enriching contemporary studies of Silla history. It is now regarded as one of the five border markers - the other four being Changnyeongbi, Bukhansanbi, Hwangchoryeongbi and Maullyeongbi - set up by King Jinheung (r. 540~576) to demarcate the newly expanded territory of his kingdom.
丹阳新罗赤城碑是位于城峙山赤城山城内的新罗时期的石碑,新罗占领高句丽领土驰城后,为了稳定民心而修建了此碑。1978年发现石碑时,碑身30㎝左右埋于地下,碑面洁净,字迹清晰。石碑上身宽而厚,下身窄而薄。石碑上端破损,而两侧却基本保持原形,看似自然石,形状自如。据估计,石碑上共有440多个字,现存288个,大部分可以辨认。每行字横竖对齐,展现了从隶属向楷书过度过程中生动的笔法,是研究书法的重要资料。碑文中有表彰帮助新罗扩大领土、奉献忠诚的赤城人的功勋,同时对于日后为新罗忠诚的人颁发同样奖赏等内容。通过碑文可以确认新罗的刑罚及行政法规—律令制度非常发达这一事实。例如,在真兴王初期设立劳役体制、财产分配相关的国法,用法律普及局限于赤城地区的习惯等。根据碑文句首中10人高官官职等级以及“三国时期”等内容,我们可以推断石碑大约建于真兴王6~11年(545~550)之间。在北方公略之战略要地赤城设立这样的石碑,表达了国家对于新领土的确认以及吸纳新的隶属高句丽人的意志。丹阳新罗赤城碑虽然不是巡狩碑(为了纪念国王亲自巡行了解民政而建的碑),但它却是融入巡狩碑精神的拓境碑(纪念领土编入而立的碑)。从这一点上看,它具有很高的价值。
城在山 ・赤城山城の内に位置した新羅時代の碑で、高句麗の領土 であった赤城を新羅が占領した後、民心を安定させるために建てたものである。1978年に30㎝程度が地中に埋もれたまま発見されたが、碑面がきれいで字がはっきりしている。碑は上が広くて厚く、下が 狭くて薄い。上部は削られてなくなったが、両側面 はほとんど原型のまま残っており、自然石を利用 したように形が自然である。全体の字数は440字程度に推定されるが、現在残 っている字は288字でほとんどが判読できる。文字は各行ごとに横列と縦列がよく整えられており、 隷書 から楷書へと移行する過程のリズミカルな筆法を見せているので、書道の研究にも良い資料になっている。碑文には新羅の 領土拡張 に助力し、忠誠を捧げた赤城人の手柄を褒賞すると同時に、将来、新羅に忠誠を尽す人にも同じ褒賞を行うという内容が書かれている。これを通じて新羅の刑罰および行政に関する法規である 律令制度の発達について新しい事実が明らかになったが、労役制度 、財産分配に関する国法が真興王の初頭に用意されたことと、赤城地方に限られた慣習を法として一般化している事実などがそれである。碑文の書き出しに言及されている10人の高官の官等と『三国史記』の内容を比べてみると、碑の建立は真興王6〜11年(545〜550)の間であると見られる。北方攻略の 戦略的要衝地である赤城地域にこの碑を建てたのは、新しい領土 に対する確認とともに新しく服属した高句麗人たちを吸収しようとした国家の意志を表現したからである。たとえ巡狩碑(王が直接巡行して民政を察した記念として建てる碑)ではないとしても、巡狩碑の精神を込めている 拓境碑(領土の編入を記念して建てた碑)という点から大きな価値を持つ。
□□□□月中. 王敎事大衆等. 喙部伊史夫智伊干□, □□□豆弥智佊珎干支, 喙部西夫叱智大阿干□, □□夫智大阿干支, 內礼夫智大阿干支, 高頭林城在軍主等, 喙部比次夫智阿干支, 沙喙部武力智阿干支, 鄒文村幢主沙喙部噵設智及干支, 勿思伐□□□喙部 助黑夫智及干支, 節敎事.
赤城也尒次□□□□中作善庸懷懃力, 使死人, 是以後, 其妻三□□□□□□□□□□□許利之. 四年少女, 師文□□□□□□□□□, 公兄鄒文村□珎婁下干支, □□□□□□□□□者, 更赤城烟去使之. 後者公□□□□□□□□□異葉耶, 國法中分与, 雖然伊□□□□□□□□□子, 刀只小女, 烏礼兮撰干支, □□□□□□□□使法赤城佃舍法爲之.
別官賜□□□□□弗兮女, 道豆只, 又悅利巴小子, 刀羅兮□□□□□, 合五人之.
別敎, 自此後, 國中如也尒次, □□□□□□懷懃力使人事, 若其生子女子年少□□□□□□□兄弟耶. 如此白者, 大人耶, 小人耶,
□□□□□□□□□部奈弗耽郝失利大舍, 鄒文□□□□□□□□□, 勿思伐城幢主使人那利村□□□□□□□□□人, 勿支次阿尺, 書人喙部 □□□□□□□□□人, 石書立人, 非今皆里村□□□□□□□□智大烏之.

⋯ 월에 왕(王)이 대중등(大衆等)인 훼부(喙部)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伊干□), 〈사훼부의〉 두미지(豆弥智) 피진간지(佊珎干支), 훼부(喙部)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大阿干□), □부지(□□夫智) 대아간지,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在] 군주(軍主)들인 훼부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훼부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훼부의 도설지(噵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성(城) 당주(幢主)〉인 훼부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에게 교(敎)한 일이다.
당시 적성(赤城)의 야이차(也尒次)에게 교하시기를 ⋯ 에 옳은 일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 죽게 되었으므로 이후 그의 처 삼(三) ⋯ 에게는 ⋯ 이익을 허락한다. 사년(四年)소녀(少女), 사문(師文) ⋯ 공형(公兄)인 추문촌의 □진루(□珎婁) 하간지(下干支) ⋯ 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後者) 공□(公□)은 ⋯ 이엽(異葉)이다. 국법(國法)에 분여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이(伊) ⋯ 자(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烏礼兮) 찬간지(撰干支) ⋯ 법을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별도로 관(官)은 ⋯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道豆只)와 열리파(悅利巴) 소자(小子), 도라혜(刀羅兮) ⋯ 합하여 5인에게 ⋯ 를 내렸다.
별도의 교령에, 이후로 나라에서 야이차와 같이 ⋯ 옳은 일을 하여 전력을 다하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많건) ⋯ 형제이다.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
⋯ 부의 내불탐학실리(奈弗耽郝失利) 대사(大舍), 추문〈촌〉 ⋯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나리촌(那利村) ⋯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훼부의 ⋯ 인(人), 비석을 세운 사람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 ⋯ 지(智) 대오지(大烏之)이다.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198 호
국보 198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사회생활 > 기념 > 비
삼국시대
단양군
1979-05-22
-
건조물>석조건축물류/비석
-
석재
금석문(해서체), 판독가능284자, 신라식 이두·한문
-
상폭107cm, 하폭53cm, 높이93cm
1기
0.9
대표 소재지 공개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대표 보관장소 공개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소유 관리 점유 정보

참고 문헌

불교중앙박물관, 2019,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강원도Ⅱ 충청북도』, 도반미디어.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충북문화유산지킴이, 2014, 『충북문화재 모니터링 점검보고서 下』.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국립한국교통대학교박물관, 2018, 『단양신라적성비의 어제와 오늘』.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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