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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Archives of Chungbuk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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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국가지정 > 보물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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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忠州 鳳凰里 磨崖佛像群
영문명 Rock-carved Buddhas in Bonghwang-ri, Chungju
지정일/등록일 2004-03-03
관할시군 충주시
이칭/별칭 보물 1401,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中原 鳳凰里 磨崖佛像群

문화재 설명정보

충주 중앙탑면 봉황리의 얕은 산중턱 바위 면에는 2군의 마애불상이 인접하여 있다. 여래좌상과 공양상, 그리고 반가사유상과 보살상 등이 함께 조각된 마애불상군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독존(獨存)의 여래좌상은 다소 후대인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이처럼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마애불상군이나 본존의 여래좌상은 형태가 같은 시무외여원인의 여래좌상이어서, 연이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반가사유상이 있는 곳 앞에 교각이 설치되어 관람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나, 마애불상 자체는 바위의 균열과 토사 등으로 인해 보존상태가 매우 불안한 상황이다.
먼저 삼국시대 마애불상부터 살펴보면, 여래좌상은 높이 1.23m 정도인 시무외여원인의 좌상으로 얼굴은 길쭉한 편이고 귀가 매우 크다. 어깨가 넓은 편이며 대의는 배 앞으로 둥글게 늘어지고 있다. 대좌는 다리 아래 공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표현하지 않은 듯하고, 오른쪽 무릎 부분에 밖을 향해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모습이 있어 사자좌(獅子座, 부처가 앉는 대좌)의 흔적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자좌의 시무외여원인 여래좌상 도상은 매우 고식(古式)으로, 6세기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되는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보물 제1941호)과 비교된다.
또한 오른편으로 승려가 아닌 일반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래좌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이 부조되어 특이한 구도를 보인다. 이 공양상의 모습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에서 보이는 공양상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며 오히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인물들과 흡사한 모습으로, 이 마애불상 전체에 보이는 고구려적 특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상에서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바위면에는 가지로 연결된 연화좌 위에 3구의 보살입상과 연이어 좌우로 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이 부조되어 있어 특이한 구도를 보인다. 주존인 반가사유상은 현재 높이 1.35m로 머리 부분은 전체가 파손되어 볼 수 없고 그 이하의 형태만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자세를 보이며 반가한 다리 밑의 옷자락도 2단으로 길게 늘어져 고식의 특징을 보인다. 사유(思惟)하는 자세의 손이나 발의 표현이 입체감이 있고 사실적이다.
보살상들의 경우는 얼굴이 좁고 긴 편이나 몸에 양감이 있고 천의가 이중 U자형으로 표현되고 있는 등 새로운 양식을 보인다. 또한 앞에 위치한 보살상이 한손을 반가상 쪽으로 들고 있는 자세나 서로 겹쳐지게 서 있는 구도 등을 통해 보았을 때 전체 마애불의 제작 시기는 7세기 초 정도로 내려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상군에서 서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바위에 조각되어 있는 독존의 마애불상 역시 시무외여원인 여래좌상이다. 옆의 불상은 제작한 이후 동일한 형식의 마애불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높이 2.6m의 비교적 큰 상으로 어깨와 결가부좌 한 다리가 넓으며, 두광에 화불이 보이는 등 앞의 마애불상군에 비해 새로운 후대의 표현들이 보인다. 따라서 이 독존 마애불상의 제작 시기는 삼국시대 말이나 통일신라초 정도로 내려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에는 시기를 달리 하는 다양한 형태의 불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충주 지역이 가지는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시기에 따라 이곳의 소속 국가가 바뀌는 역사적 운명을 겪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 진다. 충주는 특히 고구려의 남하정책에서 중심이 되었던 지역으로 일찍이 475년에 국원경(國原京)이 설치되었고, 봉황리 마애불상군 인근에서는 5세기에 건립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가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진흥왕이 북진하여 이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신라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때문에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발견 당시부터 사자좌의 여래좌상이라는 도상의 고졸성으로 인해 고구려와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그러나 보살상의 경우 몸에 굴곡이 드러나고 천의도 이중 U형의 후기적 특징을 보이는 점이 지적되면서 조성시기가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되었고, 따라서 신라와 연관 짓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마애불상의 전체적인 조각양식은 고구려의 벽화와 비슷한 공양상의 모습과 대좌, 보살들의 얼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서쪽에 위치한 독존 여래좌상의 경우는 보다 신라불상의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독존상이 제작된 시기에 이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마애불상들의 독특한 배치나 신앙적인 성격은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과 비교되어서 이곳은 미륵도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위치한 곳은 햇골산의 가파른 중턱으로, 평탄한 대지나 길도 없던 이곳에 규모가 큰 사찰이 건립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우므로 이곳은 개인적 성격의 불적(佛蹟)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 진다.
이와 같이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초기 마애불상의 예이기도 하면서 당시 충주지역의 불상 조성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These Buddhist images carved on the surface of a rocky cliff in Bonghwang-ri of Gageum-myeon, Chungju are divided into two groups, the first of which consists of the seated Buddha with offerers, and the Bodhisattva seated in the lalitasana position along with his bodhisattvas, the second of a single seated Buddha located a short way from the two groups. The two groups reflect the influence of the Buddhist art of Goguryeo, whereas the sole Buddha image from early Unified Silla. These images provide important clues about the history of the Chungju area - particularly at the time when control of the area passed from Goguryeo to Silla.
忠州市可金面(中央塔面)鳳凰里の小山の中腹にある岩壁には、2群の磨崖仏がある。如来坐像や供養像、そして半跏思惟像、菩薩像などが一緒に彫られている磨崖仏は、三国時代の高句麗仏像の影響を強く示している。少し離れた場所にある独尊の如来坐像は、やや時代が下った統一新羅初期につくられた像である。このように、鳳凰里磨崖仏は、三国時代に忠州地域の支配国が高句麗から新羅に変わっていく状況を如実に表している仏像である。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1401 호
보물 1401,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中原 鳳凰里 磨崖佛像群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상
통일신라
충주시
2004-03-03
-
회화·조각>석불(부동산)
-
석재
-
-
1.23~2.6m
9구
1,375.0
대표 소재지 공개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산27
대표 보관장소 공개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산27

소유 관리 점유 정보

참고 문헌

해동문화재, 2012~2013,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보존처리』.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충북문화유산지킴이, 2014, 『충북문화재 모니터링 점검보고서 上』.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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