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인 충경공 유백증(兪伯曾, 1587∼1646)의 정사공신교서이다. 정사공신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이 컸던 50명의 인사에게 사급된 공신훈호(功臣勳號)로, 제1등에는 김류(金鎏) 등 9인, 제2등에는 김경징(金慶徵) 등 14인, 제3등에는 박유명(朴維明) 등 27인이 임명되었다. 유백증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이다. 증조는 유관(兪綰)이며, 조부는 우의정 유홍(兪泓)이다. 부친은 좌찬성 유대일(兪大逸)이며, 모친은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등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직에 머물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찾아가 사도시정(司䆃寺正)에 임명된 뒤,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631년에는 충청도관찰사, 1635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계속해 밀고 나가 충직함이 인정되어 복직되기도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취헌소차(翠軒疏箚)』 3권 3책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교서의 크기는 38×180㎝이며 내용은 초상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을 2계급 올려주었고 또한 부모와 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2계급 올려주었으며, 자식에게는 벼슬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관에서 일하는 노비와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 등을 합쳐 19명의 노비, 밭 80결, 은 30량, 옷감 1단, 말 1필 등을 내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문서의 끝에는 천계(天啓) 3년(1623) 4월의 사급일자(賜給日字)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사급일자 위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이 교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에 대한 포상의 내역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공신 연구는 물론 인조반정 당시의 인물 및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This is a royal certificate issued to Yu Baek-jeung (1587~1646), a civil official of late Joseon, attesting that he was dubbed a Jeongsagongsin. Jeongsagongsin was a title bestowed upon fifty officials who made a notable contribution in the Restoration of Injo of 1623. This letter, considered invaluable for the details of rewards issued to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Restoration of Injo, provided in it, is also important as a source of information about the participants of this event as well as Jeongmyo Horan and Byeongja Horan, the two successive Manchu invasions that occurred in 1627 and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