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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Archives of Chungbuk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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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척화비
시도지정 > 충북 기념물 옥천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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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沃川 斥和碑
영문명 Cheokhwabi (Stele condemning reconciliation) in Okcheon
지정일/등록일 1976-12-21
관할시군 옥천군
이칭/별칭 기념 6

문화재 설명정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외침을 격퇴한 뒤 전승을 기념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서양 배척의 의지를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것이다. 이때 옥천에도 척화비가 세워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타 일본공사의 요구로 전국의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다. 이 때 옥천의 척화비도 땅에 묻혔다가 후에 옥천읍 삼양리 경부선 철로 옆에 다시 세워 놓았다. 이후 산기슭인 옥천읍 삼양리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옥천 척화비의 규모는 높이 135㎝, 폭 45㎝, 두께 26㎝이며 화강암으로 된 비갈형(碑碣形) 비석이다. 비문은 다른 척화비들과 마찬가지로 1행에 “양이침범비전칙(洋夷侵犯非戰則)”, 2행에 “화주화매국(和主和賣國)”, 작은 글씨로 3행에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작은 글씨로 4행에 “병인작신미립(丙寅作辛未立)”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상태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6·25전쟁 때 생긴 탄흔이 남아 있다.
옥천 척화비는 충청북도에 남은 두 개의 척화비 중 하나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의 모습과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This stele, called a cheokhwabi, is one of many that were erected in strategic locations across the country at the command of Heungseon Daewongun, the biological father King Gojong of the Joseon Dynasty, after historic battles with two Western powers, France in 1866 (“Byeonginyangyo”) and the USA in 1871 (“Sinmiyangyo”). The stele in Okcheon was erected in 1871 and bears an inscription describing the daewongun’s firm decision to isolate the dynasty from powerful western countries. It reads: “Western barbarians are encroaching upon our territory; failure to resist is appeasement: appeasement means selling out the country.”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006 호
기념 6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사회생활 > 기념 > 비
조선시대
옥천군
1976-12-21
-
분묘ㆍ비 등>비
-
석재
-
비신석, 비대석
135X45X26cm
1기
1,166.7
대표 소재지 공개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4
대표 보관장소 공개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4

소유 관리 점유 정보

참고 문헌

충북문화유산지킴이, 2014, 『충북문화재 모니터링 점검보고서 下』.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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