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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Archives of Chungbuk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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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
시도지정 > 충북 기념물 제천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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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堤川 元昊 遺墟碑 및 觀瀾亭
영문명 Memorial Stone for Won Ho and Gwallanjeong Pavilion, Jecheon
지정일/등록일 1994-06-24
관할시군 제천시
이칭/별칭 기념 92

문화재 설명정보

제천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은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에 위치한 조선 후기에 세워진 비석과 정자이다.
관란정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었던 원호가 단종을 그리면서 서강가에 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문안을 드리던 장소이다. 원호가 죽은 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원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45년(헌종 11)에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원호의 호를 따서 ‘관란정’이라 하였다.
관란정은 정면 2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구조는 별도의 기단 없이 맨땅바닥 위에 두리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누마루 주위로는 머름동자를 세우고 널로 막아 댄 난간을 설치하였다. 가구형식은 4면 가운데 기둥 위에 십자로 장통보를 걸고 장통보 상부 양쪽에 장여가 井자로 받친 중도리를 걸었다. 중도리 위로는 우물반자를 만들고 반자 주변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연등천장이 되게 하였다. 공포는 이익공 형식으로 하였으며, 보머리 뺄목 끝에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장식을 더했다.
원호유허비는 원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관란정 건립과 함께 세워졌다. 비석은 기초석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자연석 위에 세웠으며 비문의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크기는 높이 174㎝, 너비 54㎝, 두께 25㎝이다.
제천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은 임금을 향한 충심을 끝까지 지킨 원호의 정신이 스며있는 역사적 장소로, 충효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생생한 교육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The Memorial Stone for Won Ho and Gwallanjeong Pavilion were built in Janggok-ri, Songhak-myeon, Jecheon-si, Chungcheongbuk-do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Following the dethronement of King Danjong (r. 1452~1455) and his exile to Yeongwol, Won Ho, one of his most loyal retainers, erected an altar near the Seogang River where he made deep bows and shed tears of grief in the mornings and evenings toward Yeongwol, the former king’s place of exile. After Won Ho’s death, his descendants and Confucian scholars set up the memorial stone and the pavilion in 1845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Heonjong) to commemorate his loyalty.
The pavilion was named Gwallanjeong after his pen-name, Gwallan.
<제액>
朝鮮忠信觀爛元昊生蹟墟卑

<전면>
嗚呼此古學士元公觀瀾亭遺址也公以我 世宗四年登第○事 文宗官至集賢殿直提學 端宗 初服謝病歸原○逮 端宗遜于越之淸○浦公卽其江上流築土爲○ 樹爲亭名以觀瀾逐日登臨 望君所寓丹○與夫人手灌園鋤圃取蔬果納空匏又有詩浮于江達于浦 端宗上○公就墓傍泣血 居廬朝夕哭拜盡喪三年乃歸原州之霧巷閉戶不見人○從子原城君孝然以 光廟勳臣屛其騶徒 踵門請見公拒而不納 光廟特除戶曺參議矢死不起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盖 ○陵在東故也 方公之在亭也隣有嫠婦爲人○○日○江干則公常常先已出○亭上其女異之請聞其意公 然曰 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吾之○此不忘吾舊君故也其女聞而泣曰妾早○夫夭獨居難行意將 適人今聞公言身雖○賤於心有戚戚焉遂終身守貞云雖愚婦愚夫聞公節義莫不感激欽慕所謂頑 懦可變者非耶嗚呼乙丙之際至艱…之會也公先見幾於未然超然○引旣得大雅之明哲末又盡節遂 志以畢君臣之義其視六臣所謂殊塗而一致者也然見幾於初猶可及也盡節於終泯然無跡 可爲

<후면>
難箕子之明夷利艱…貞允爲○矣公諱昊字子○遭時不幸自焚其詩章著述○晦其迹故事蹟無傳焉
肅廟戊寅追復 莊陵褒當時節義之士特○公閭又○享于原州耘谷書院及咸安西山書院 正
宗甲辰 贈謚曰貞簡越之人慕公義不已就觀瀾亭遺墟願以表章而爲不泯其卓然之迹公之傍孫
羽孫方守原州捐○伐○方伯沈侍郞晋賢助成之走人請文於余余○○公○而悲公志者久矣書其
本末系之以○○曰淸○之水…上有白雲如盖有鳥有鳥啼何苦前有百鳥羅…拜王孫○兮不歸春艸生 兮○綿小亭巖臨水…水…流人去何年水…無盡兮名將傳
「崇祿大夫原任吏曺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府都○管洪良浩 撰」
通 政大夫行寧越都護府使兼原州○管兵馬同僉節制使討捕使 林孝憲書○篆
此記文受而○之久矣事力不逮○未竪碑先生十二世孫衡○定孫謀於諸宗鳩財伐石能辦幾百
年未遑之事其追慕之誠有足感人遣其族侄在寅○懇拙筆○不獲既爲書之○識其事如右云

<우측면>
崇禎紀元後四乙巳十一月 立  有司永禧 在亨 永寅 碩昌 有恒

조선충신관란원선생유허비(朝鮮忠臣觀瀾元先生遺墟碑)

아아! 이곳은 옛날 학사(學士) 원공(元公)의 관란정(觀瀾亭)이 있던 옛 터이다. 공은 우리 세종대왕 4년(142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문종을 섬겨 관직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단종이 처음 정사를 보실 때에 병으로 사직하고 원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청령포로 물러나게 되자 공도 그 강 상류로 가서 흙을 쌓아 누대(樓臺)를 짓고 이어 정자를 만들어 관란(觀瀾)이라 이름 짓고는 날마다 올라가서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밭에 물주고 김매어 채소 과일을 거두어 빈 박통에 넣어서 수시로 강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묘소 곁으로 가서 여막을 짓고 피눈물을 흘리며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하며 절하고 3년상을 치른 다음 이에 원주의 무항(霧巷)으로 돌아가서 방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조카인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세조의 공신이었는데 하인들을 물리치고 문 앞에 서서 공을 뵙기를 간청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들이지 않았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다가 일생을 마치니 이는 장릉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공이 정자에 거처할 때에 이웃에 과부가 있어 남의 빨래를 해주느라 날마다 강가에 가면 공이 언제나 먼저 나와서 정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듣고자 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나의 옛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이 말을 듣고 울며 말하기를 “제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기가 어려워 장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공의 말씀을 들으니 몸은 비록 미천하나 마음에 슬프고 미안합니다.” 라 하고 마침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공의 절의를 듣고는 감격하고 공경하여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고하거나 나약한 사람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을해년과 병자년(1455~1456년)은 지극히 어려운 때였다. 공은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그 기미를 알고 초연하게 멀리 떠나갔으니 이미 큰 선비의 명철함을 보였으며 마지막에는 또 절개를 다하고 뜻을 이루어서 군신간의 의리를 다하였으니 사육신(死六臣)과 비교하면 이른바 길은 달라도 뜻은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에 기미를 아는 것은 그래도 미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절개를 다하는 것은 기록이 없어져 자취가 없으니 더욱 알기가 어려운 일이다. 기자(箕子)의 명이리간정(明夷利艱貞) 어려운 때에도 절개를 잃지 않는 것이 이로움이 여기에 꼭 부합할 것이다.
공의 이름은 호(昊)요 자(字)는 자허(子虛)이다. 불행한 때를 만나서 저술한 시와 글을 스스로 불사르고 자취를 숨겼기 때문에 일과 행적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숙종 무인년(숙종 24, 1698년)에 단종을 복위하고 당시의 절의있는 선비들을 표창하였는데 특별히 공에게 정려하였으며 원주의 운곡서원(耘谷書院)과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하였으며 정조 갑진년(정조 8, 1784년)에는 시호를 내리어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선생의 절의를 사모하는 마음 금할 수 없어 관란정의 옛 터에 표식을 하여 그 높은 자취가 잊혀지지 않게 하고자 하였는데 선생의 방손(傍孫)인 우손(羽孫)이 그 때 원주의 수령으로 녹봉을 덜어내어 돌을 다듬고 감사 심진현(沈晉賢)이 찬조하여 일을 완성하고는 사람을 급히 보내어 내게 글을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선생의 절개를 높이 추앙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여 온지 오랜 터이라 그 전말을 적고 이어 글을 붙이는 바이다. 글을 올리니,

청령포 물 위에 흰 구름은 일산 같은데
새가 있어 그 새가 애달피 우는데
그 앞에 온갖 새 날아들어 절하는구나.
전에 놀던 그 왕손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만 해마다 나서 마냥 우거지구나.
정자와 바위 물가에 섰는데
물 흐르고 사람간지 몇 해인가
저 물이 끝없이 흐르듯 임의 이름 길이 전하리라.

숭록대부 원임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
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홍양호(洪良浩)는 글을 짓고,
통정대부 행 영월도호부사 겸 원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토포사 임 … 는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한다.

이 기문(記文)은 받아서 간직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금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선생의 12세손 형진(衡鎭)과 정손(定孫)이 여러 종인과 상의하여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 몇 백년간 이루지 못한 일을 능히 처리하니 그 추모하는 정성이 족히 사람을 감동시킴이 있다. 그 족질인 재인(在寅)을 보내와서 졸필을 간청하니 사양할 수 없어 이미 기록한 것과 아울러 그 일을 위와 같이 적는다.

숭정 기원후 넷째 을사(1845, 헌종 11) 11월 일에 세움
유사(有司) 영희(永禧)·재형(在亨)·영인(永寅)·석창(碩昌)·유항(有恒)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092 호
기념 92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사회생활 > 기념 > 비
주생활 > 건축물 > 정자건축
조선시대
제천시
1994-06-24
-
분묘ㆍ비 등, 교육ㆍ사회사업에 관한 유적>분묘ㆍ비 등/비, 교육ㆍ사회사업에 관한 유적/누정
-
석재, 목재
팔작지붕
가구식구조(1고주5량가), 목구조, 가첨석, 비신석, 비대석(자연암반)
유허비: 174cm, 관란정: 정면2칸, 측면2칸
일곽
6,602.0
대표 소재지 공개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14-2
대표 보관장소 공개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14-2

소유 관리 점유 정보

참고 문헌

충북문화유산지킴이, 2014, 『충북문화재 모니터링 점검보고서 上』.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불교중앙박물관, 2019,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강원도Ⅱ 충청북도』, 도반미디어. [아카이브 > 학술자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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