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는 박해를 피해 숨어들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敎友村)이다. 1850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한국명 안돈이 安敦伊] 성인 주교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朝鮮敎區神學校)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세례명 토마스)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선교사 프티니콜라[한국명 박덕노 朴德老] 신부와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 1827〜1903) 신부가 1853년부터 1864년까지 배티 신학교 건물을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를 해 일대에 안장되었다. 배티 성지는 1958년부터 청주교구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77년부터 청주교구장에 의해 성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1978년에 순교자묘가 단장되었고, 1997년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이 건립되었다. 2001년 2칸 규모의 초가(草家)로 재현한 천주교구신학교가 위치하고 있고 역내에는 삼박골 교우촌터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 순교자 유데레사 묘,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 무명 순교자 6인 묘 등이 위치하고 있다. 성지에서 백곡 쪽으로 2.8㎞에 위치하고 있는 삼박골과 순교자 묘는 칼래 신부의 피신처이며 소설 『은화』의 무대가 됐다. 2012년에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이 들어섰고, 2014년에는 순교박해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진천 배티 성지는 순교자들의 본향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司牧) 중심지이며, 그리고 최초의 조선교구신학교 정착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This is a hideaway village formed by Catholics in the 1830s during the severe Catholic persecution. French missionary Marie-Nicolas-Antoine Daveluy (Korean name: An Don-i) set up the country’s first seminary here in 1850. The 2 kan-sized* seminary building with a thatched roof was renovated in 2001. The village is home to the site of the Sambakgol Catholic Followers Village and the tombs of more than twenty martyrs. Father Choe Yang-eop also performed his pastoral duties here.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