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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강세황 묘소
시도지정 > 충북 문화유산자료 진천 강세황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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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鎭川 姜世晃 墓所
영문명 Tomb of Gang Se-hwang, Jincheon
지정일/등록일 2011-03-04
관할시군 진천군
이칭/별칭 문자 83

문화재 설명정보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 묘소이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황건너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강세황은 '예원의 총수(藝苑 總帥)'라 불릴 만큼 당시 예술계의 선구적 지도자였다. 그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자 뚜렷한 서화관을 지니고 높은 안목의 감식안으로 많은 사람의 그림과 글씨에 평을 쓴 평론가로서도 유명하다. 한국적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세계를 개척한 그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 그리고 서양화풍의 수용 등 조선후기 화단의 흐름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다.
특히 강세황이 화원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의 스승이며, 노년에는 문인화가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에게도 그림을 가르친 사실은 한국회화사상 사승관계가 밝혀진 희귀한 예로서 주목된다. 그는 제자 김홍도와 일생 예술로 맺어진 가장 중요한 인연을 이어갔다. 강세황이 쓴 김홍도의 전기 「단원기(檀園記)」·「단원기 우일본(檀園記又一本)」은 한국 대표화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는 기념비적 자료이다.
강세황은 1713년(숙종 39) 윤 5월 21일 서울 남산기슭 남소동(南小洞)에서 아버지 문안공(文安公) 현(鋧)과 어머니 광주이씨의 3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繭菴), 노죽재(露竹齋), 표암(豹菴) 등이며 젊어서는 ‘첨재’ ‘산향재’, 중후반에는 ‘표암’을 많이 썼으며 표노(豹老)라고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詩)도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20대 초반과 후반에 부모상을 당하여 막내인 그가 6년간 여묘(廬墓)를 살았다. 21살 1733년(영조 9) 때 그가 아버지를 따라 진천에 간 기록이 있다. 아버지 문안공이 둘째 자부의 장지를 보러 진천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그가 모시고 가려하였으나 허락지 않아서 몰래 뒤따라 나서서 돌봐드리고 병이 났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극진히 시중을 들었다. 진천 문백면 도하리 일대는 그의 증조 죽창공(竹窓公) 때 자리 잡아 세거하던 곳이다.
32살 때 가난 때문에 처가가 있는 안산(安山)으로 옮겨 60대 벼슬에 나아갈 때까지 시서화를 즐기며 산수 유람을 하는 등 문예를 중심으로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그는 호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거치며 만년까지 활발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평소 바라던 중국 사행과 금강산 여행을 하면서 실경을 그린 작품들이 남아 있다.
71살 1783년(정조 7) 때 지위가 높고 장수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기로사(耆老社)에 그가 이름을 올리고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3대가 연이어 기로사에 든 가문은 조선시대 통틀어 극히 드문 예이다.
일생 속기 없는 서화의 세계를 추구하며 "공영쇄락(空靈洒落)", 즉 텅 비면서 영롱하고, 맑고 시원한 경지를 그림의 이상으로 삼았던 그는 동아시아 문인화의 보편성과 한국성을 두루 갖춘 한국적 문인화를 이루어냈다.
노년의 강세황을 보고 정조는 "풍채가 고상하여 늙은 신선도와 같다" 하였다. 평안한 말년의 여유를 누린 그는 스스로 "근래에 상당히 건강하여 조금도 병이 없고 간혹 거문고와 노래로 긴긴해를 보내고 있다" 하였다. 남산 밑 거처가 정결하고 생활이 안정되고 자연스러웠다. 좌우에 서적을 쌓아 놓고 발을 드리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거나, 밝은 용모에 백발을 휘날리며 간혹 고목이 된 소나무, 참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1791년(정조 15) 정월 대수롭지 않은 병환이 들어 23일 술시(戌時)에 정신이 흐리지 않았으며 붓을 달라하여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 (蒼松不老 鶴鹿齊鳴)" 8자를 쓰고 죽은 뒤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3월22일 묘시에 진천 백락면 대음리(현재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동남향한 곳에 장사지냈다. 정원용(鄭元容)이 시장(諡狀)을 지었다.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현재 남아있는 강세황의 묘소는 상석과 좌우에 문인석 망주석을 갖추었으며, 정경부인 진주유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소 앞에는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다.
Gang Se-hwang is a prominent scholar painter of the late Joseon period. Pursuing the painting of pure and cool landscape with empty spaces, free from mundane affairs, he established Korean-style painting covering the generality of East Asian paintings an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paintings. The tomb consists of a wide stone table for ritual offerings, a stone statue of civil official, and a pair of stone posts. His wife, who is from Jinju Yu clan, is also buried in his tomb. His stele whose epitaph was composed by Yi Ga-won stands 200m away in front of the tomb.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083 호
문자 83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사회생활 > 의례생활
조선시대
진천군
2011-03-04
-
분묘ㆍ비 등>분묘
-
석재, 흙
단분(單墳)
배치(봉분, 상석,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
1곽
2,307.0
대표 소재지 공개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대표 보관장소 공개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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