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립(鄭雴; 1554∼1640) 옥천 출신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방(霶). 자는 군흡(君洽), 호는 고암(顧菴)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학유·전적·좌랑 등을 비롯하여 진해현감·경상도도사를 거쳐 1623년(인조 1) 춘추관기주관 겸 교리와 정랑·군자감정·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헌(趙憲)·이충범(李忠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보급하였으며, 진해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진흥시키고 농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정립(鄭雴) 문적(文籍)은 정립의 일기인 고암기(顧菴記, 1586년(선조 19)부터 1592년(선조 25) 까지)와 1582년(선조 15)부터 1616년(광해군 8)까지 정립에게 발급된 고문서로, 정립의 관직생활 등 개인의 이력사항을 알 수 있는 사료임과 동시에 임진왜란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1582년(선조 15)에 발급된 개명첩은 예문관에서 내린 첩지로 진사 정방의 이름을 정립으로 바꾸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경국대전』에는 개명하고자 하는 자는 이조에서 국왕께 아뢴 후, 예문관으로 이첩하여 명부에 기록한 뒤 문서를 발급하여준다고 되어 있다. 관문서(개명첩)가 목판본으로 제작된 드문 사례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