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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Archives of Chungbuk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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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맹경 묘비
비지정 > [비지정] 유형문화유산 단양 신맹경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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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丹陽 申孟慶 墓碑
영문명 Unknown
지정일/등록일 2023-12-20
관할시군 단양군
이칭/별칭 충청북도 금석문 기초조사, 충북 금석문

문화재 설명정보

단양읍 현천리 경로당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능선에 위치한다. 이곳은 평산신씨묘역에 해당한다. 신맹경은 단양 북평리 사람으로 자(字)는 백상(伯祥) 호(號)는 운계(雲溪)이며, 제천현감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평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국가에 충성심이 깊었다고 하며 단성면 북하리에 그의 효자각과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신맹경 묘소는 숙부인 칠원윤씨와의 합장묘이다. 묘비는 봉분의 좌측에 약간 떨어져 설치되어 있고, 봉분 앞으로 근래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묘비는 지대석과 비신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대석은 땅 속에 대부분 묻혀 있다. 비신은 윗면은 호형(弧形)으로 다듬었는데 전면에는 총탄을 맞은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이밖에도 비신 곳곳에서 이끼와 지의류에 의한 피해가 확인되고, 곳곳이 마모되었으나 글자의 획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전면>
淑〇人〇原尹氏 通訓大夫堤〇縣監申公 之墓
六代孫 在坤
七代 傍系 宋魯
傍系 禎學 在亨
九代孫 在壽
崇禎 紀元…十閏五月十三日 八代孫 禎潤謹 立

<후면>
孝子 堤川縣監 申公墓表
丹陽奧區也 雲岩之洞 山水絶奇 余愛之 每徜徉於其間 一日沿溪而下 憩于所謂北坪村 則有小臺臨
水 植以栴檀 翛然若隱者之居 諗于里長老 咸曰 是故篤孝人申公之宅也 今其孫益謙氏能謹守其家
爲一鄕所推訐 余就叩之 儘恂恂長者人 揖余而升 斂袵而言曰 吾祖性至孝 父病疽吮之 又嘗十年侍
○ 晝夜不解帶 及喪致毁 居廬啜粥 不食鹽菜 三年如一日 又於母病 嘗糞驗吉凶 醫言蝟肉可已之 求
之不得 號泣于野 忽有蝟前走 持而進之 病卽愈 後又折指 出血和藥 得復甦 常與二弟共一室 友愛切
摰 至其分異也 捐其財 築屋而居之 又擇其人土之良且美者與之 事聞朝廷旌其閭 其實蹟載三綱
續錄 故郡守蒼石李公埈 編邑誌記其事尤詳 余作而曰 世衰敎弛 民不與行久矣 不意王祥薛包復生
於斯也 益謙氏又言曰 吾祖制行莊肅 見人不善 若將凂已(己) 有一壻光海時參廢母疏 後登第榮歸 閉
門不見 隣有少艾 闚觀而慕悦之 其母嘗夜密來 請使薦枕 拒之甚嚴 萬曆癸甲之歲 餓者坌集 計口
而哺 濟活甚衆 中有持瓢二丫鬟 泣請終身服役 異其言貌 使居宅内 戒童僕無得相近 後求其族而還
之 果良家也 噫 吾祖之德善事行 必不止此 益謙少孤 無從可詳 其得於鄕里相傳道者 僅此數事而已
余又歎曰 此於公固爲䟽節 而皆足爲後人式 宜不可泯沒也 居數年益謙氏謁碑記于尤庵老先生 樹
之門閭 又數年謂余曰 墓在荒山空谷中 不有表 後世誰知者 今將堅數尺之石 子其文之 余辭謝不敢
當 旣而思之 余晩出雖未及掃公之門 其聞風而激昻者深矣 託名於斯 與有榮矣 遂撮其世系履歷而

<좌측면>
敍之曰 公諱孟慶字伯祥 號雲溪 原州人 其先信城府院君贊 贊生承旨居義 居義生察
訪致安 致安生僉正淑倫 是公之高祖也 曾祖曰 希哲生員 祖曰應瑞 考曰介福直長 妣
曰善山白氏 主簿珩女 公生於㄰嘉靖庚戌 二月三日 以孝行初授西部參奉 爲養不就
再爲社稷參奉 乃拜㄰命 累官爲陽城 堤川縣監 後除昌寧 則辭不赴 年七十二㄰天啓
辛酉六月六日卒于家 葬郡東栗峴負艮之原 配尹氏祔焉 尹氏父健 其曾祖碩輔哉

<우측면>
弘文館直提學 擧二男三女 男縝 綽 女長適金以一 文科 次適許茳 次適辛象復 側出男綸 絡 紈
縝之子守謙 綽之子好謙 益謙 庶孫尙元 綸出 昌立 昌元 昌世 絡出 孝誠 必誠 紈出 孝誠登武
科爲折衝萬戶 內外曾玄多不盡載云 銘曰 閟彼丹山 九苞攸翔 睪如而宰如者 孝子之
藏 其骨雖朽 其名則香 我銘以詔後 千秋萬歲兮 無敢毁傷
大匡輔國崇祿大夫安東 權尙夏撰

<전면> 숙○인○원윤씨
통훈대부 제○현감 신공의 묘
육대손 재곤
칠대방손 송로
방손 정학 재형
구대손재수
숭정기원 …오년 윤오월 십삼일 팔대손정윤 삼가 세우다.

<후면> 효자 제천현감 신공 묘표
단양은 오지이다. 구름과 바위의 마을로서 산수가 빼어내 내가 그를 사랑하여 늘 그 사이를 거닐었다. 하루는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다 북평촌이란 마을에서 쉬었는데, 작은 누대가 물가에 있었고 향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마치 은자가 거처하는 곳 같았다. 마을 늙은이들에게 고하니 모두 말하길 “이곳은 독신할 효자 신공의 집이 있는 곳이며 지금도 그 손자 익겸씨가 삼가 그 집안을 지키고 있어 고을 전체가 추대를 한 까닭”이라 하였다. 내가 찾아가니 참으로 정성스러운 장자다운 인물이었다.
나에게 읍을 하고 올라와 옷깃을 여미며 말하길 “우리 할아버지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등창을 앓고 있을 때 입으로 빨아내었고, 또 십년 동안 병 시중을 하면서 밤낮으로 허리띠를 풀지 않았습니다. 상을 당하여 몸을 훼손할 지경에 이르도록 여막에 거처하며 죽만 마시고 소금이나 채소도 먹지 않기를 3년을 하루 같이 하였습니다. 또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변을 맛보고 길흉을 살폈으며 의원이 고슴도치 고기를 먹으면 족하다고 말함에 구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어서 들판에서 울고 있는데 홀연히 고슴도치가 달려오니 이를 가지고 나아가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후에 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약에 타서 회복시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두 아우와 한 집에서 거처하며 우애가 매우 극진하였으며 분가할 때에 이르러 그 재산을 덜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으며, 또 그 사람이나 땅도 좋은 것을 골라서 주었습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려토록 하니 그 실적이 삼강속록에 실려 있으니, 군수 창석 이공 준이 편찬한 읍지에 그 일이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말하길 세도가 쇠미해지고 교화가 해이해져서 백성이 행동을 따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뜻밖에 왕상과 설포가 이 곳에 다시 태어났었구려”라고 하였다.
익겸씨가 또 말하길 “우리 할아버지는 몸가짐이 엄숙하며 타인의 잘못을 보면 마치 장차 자신이 더러워지는 듯하였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폐모소에 참여한 사위가 하나 있었는데, 후에 등제하여 영예롭게 돌아왔으나 문을 닫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 소애한 여자가 있어 몰래 살펴보며 사모하였는데, 그 어미가 일찍이 밤에 몰래 찾아워 그로 하여금 천침하기를 청하였는데, 엄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만력 계와 갑년 해에 굶주린 자들이 모여들자 호구를 헤아려 먹여 많은 대중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들 중 양갈래 머리를 하고 바가지를 쥔체 울면서 종신토록 복역하겠다고 간청하였는데, 말이나 용모가 범인과 달라 집안에 거쳐하게 하여 사내 종들을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후에 그 가족을 구하여 돌려보내주니 과연 양가의 달이었다고 합니다.
아, 우리 할아버지의 덕과 선행은 반드시 이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만 제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자세히 알 길이 없고, 마을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얻은 것이 겨우 이러한 몇몇 일에 불과합니다.”라고 하니, 내가 또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것이 공에게는 진실로 하찮은 일이지만 모두 후인의 법식으로 삼기에 족한 것이니 마땅히 민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수년이 지나고 익겸씨가 비기를 우암 노선생에게 여쭙고 마을에 세웠으며, 또 몇 해가 지나 나에게 일러 말하길 “묘가 황량한 산과 빈 골짜기에 있으며 묘표가 있지 않아 후세에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지금 장차 몇 자되는 비석을 세우니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사례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내가 늦게 태어나 비록 공의 문하에 빗질은 못하였지만, 그 명성을 들음에 격앙됨이 깊거늘 이에 탁명을 한다면 영예로룸이 있겠다 하여 마침내 그 세계와 이력을 모아

<좌측면>서술하여 말한다. 공의 휘는 맹경이며 자는 백상이고 호는 운계로 원주 사람이다. 그 선조는 신성부원군 찬이며, 찬이 승지를 지낸 거의를 낳고 거의가 찰방을 지낸 지안을 낳았으며, 지안이 첨정을 지낸 숙륜을 낳았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되신다. 증조 희철은 생원이며 조부 응서이고, 아버지는 개복으로 직장이며 어머니는 선산 백씨로 주부를 지낸 형의 딸이다. 공은 가정 경술년 2월 3일에 태어났으며, 효행으로 처음 서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나아가지 않고 다시 사직 참봉이 됨에 곧 명을 받아 여러번 관직에 제수되어 한성과 제천 현감이 되었다. 뒤에 창녕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나이 72세인 천계 신유년 6월 6일에 집에서 졸하였으며, 군의 동쪽 율현의 부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윤씨가 부장되었다. 윤씨의 아버지는 건이고 증조는 석보이다.

<우측면> 홍문관 직제학 벼슬을 지냈다. 자식은 모두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과 작이고 딸은 장녀로 문과에 급제한 김이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허강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신상복에게 시집갔다. 측출 자식으로 윤, 낙, 환이 있다. 진의 아들은 수겸이며, 작의 아들은 호겸, 익겸이다. 서손 상원은 윤의 소생이고, 창립, 창원, 창세는 낙의 소생이며, 효성, 필성은 환의 소생이다. 효성은 무과에 올라 절충만호가 되었다. 안과 밖으로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다 실을 수가 없다. 명하여 말하길
깊은 저 단산은
구포가 날개를 펼치는 곳이라네
둥글고 볼록한 곳은
효자의 무덤이라네
그 뼈는 이그러질지라도
그 명성은 향기롭다오
내가 명하여 후세에 알리노니
영원토록 감히 훼손하지 말지어다

대광보국숭록대부안동 권상하 지음.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002 호
충청북도 금석문 기초조사, 충북 금석문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사회생활 > 기념 > 비 > 기타
조선시대
단양군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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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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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석, 비대석
전체높이 153㎝, 비신높이 148㎝, 비신너비 60㎝, 비신두께 27㎝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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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관리 점유 정보

참고 문헌

丹陽郡, 2005, 『丹陽郡誌』下, 572쪽.
단양문화원, 2005, 『단양의 금석문』, 151~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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