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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Archives of Chungbuk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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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팔영루 사적비
비지정 > [비지정] 유형문화유산 제천 팔영루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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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堤川 八詠樓 事蹟碑
영문명 Unkonwn
지정일/등록일 2024-03-12
관할시군 제천시
이칭/별칭 충청북도 금석문 기초조사, 충북 금석문

문화재 설명정보

팔영루 사적비는 청풍문화재단지 내 팔영루 문밖에 위치한다.
비석은 직육면체 형태이며, 그 위를 둥글게 호형(弧形)으로 둘렀다. 기단은 마찬가지로 네모반듯한 직육면체 모양으로 설치하였다. 비신 전면에는 상단에 전서체로 ‘팔영루사적비(八詠樓事蹟碑)’라는 제목이 있고, 그 아래로 팔영루의 내력이 적혀 있다. 여기에 따르면, 1702년(숙종 28) 부사 이기홍이 중건하고 남덕문(覽德門)이라 한 것을 1870년(고종 7)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후면에는 건립 당시 관직에 종사한 인물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제액>
八詠樓事蹟碑

<전면>
古人有言曰樓臺之發興有關於民物之興衰余於八詠樓
見之直齋李先生○建之而頹圮也今百餘年矣余自江西
莅此邑之○○○○○邑之凋殘周覽形勢臨其樓之舊址
有五六○○○○睦間出感舊而言曰樓在之時邑府繁華
樓頹之後閭里蕭條○不得復見民物之盛也余聞而惜之
田民之興衰係於斯樓則曷不爲民而重建也今年夏董工
興役重修樓廨寒碧錦南先之八詠次之若錢塘之兼有美
而○○之盛○○○見矣後來君子爲民而葺之則宜斯樓
之不廢云 崇禎後五庚午知府龍仁李稷鉉記

<후면>
都監官座首劉應五
    別監柳重鍵
別看役江西金以璜
    都色金漢朸
    戶長金民秀
    吏房李東爀
    色吏韓應烈
    將校高信哲
木手都片手金致成
    石手金順元
    畵員僧奉玟

옛 사람의 말에 누대(樓臺)의 발흥(發興)은 백성과 물자의 흥망성쇠와 관련 있다고 하였다. 내가 팔영루(八詠樓)에서 직재(直齋) 이선생(李先生)이 세운 것을 보니 퇴락한 지 이제 백여 년이라. 내가 강서(江西)로부터 이 고을에 부임하니 … 고을의 조잔(凋殘)하니 형세를 두루 살펴 기 누의 옛 터에 이르니 5, 6○가 있어 … 사이에 감흥이 생겼다. 옛 말에 이르기를, “루가 있을 때 고을이 번화하였고, 루가 퇴락한 후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다시는 백성과 물자의 풍성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내가 듣고 애석해 하였다. 백성[田民]의 흥망성쇠는 이 루와 관계되니 어찌 백성들을 위해 중건하지 않겠는가. 금년 여름 일을 맡아 벌여 누각과 공해를 중수하니 한벽(寒碧)과 금남(錦南)이 먼저이고, 팔영(八詠)이 다음이라. 재물을 마련하여 수축할[錢塘] 것 같으면 겸하여 아름다움이 있고, …의 성함을 볼 것이다. 후래(後來)의 군자(君子)가 백성을 위해 수즙하면 마땅히 이 루는 폐하지 않을 것이라.
숭정(崇禎) 후 다섯째 경오(庚午, 1870년, 고종 7)에 부사 용인(龍仁) 이직현(李稷鉉)은 쓰다.

도감관(都監官) 좌수(座首) 유응오(劉應五)
    별감(別監) 유중건(柳重鍵)
별간역(別看役) 강서(江西) 김이황(金以璜)
    도색(都色) 김한력(金漢朸)
    호장(戶長) 김민수(金民秀)
    이방(吏房) 이동혁(李東爀)
    색리(色吏) 한응열(韓應烈)
    장교(將校) 고신철(高信哲)
목수(木手) 도편수(都片手) 김치성(金致成)
    석수(石手) 김순원(金順元)
    화원(畵員) 승(僧) 봉민(奉玟)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183 호
충청북도 금석문 기초조사, 충북 금석문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사회생활 > 기념 > 비
조선시대
제천시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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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ㆍ비 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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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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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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