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읍 현천리 경로당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능선에 위치한다. 이곳은 평산신씨묘역에 해당한다. 신맹경은 단양 북평리 사람으로 자(字)는 백상(伯祥) 호(號)는 운계(雲溪)이며, 제천현감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평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국가에 충성심이 깊었다고 하며 단성면 북하리에 그의 효자각과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신맹경 묘소는 숙부인 칠원윤씨와의 합장묘이다. 묘비는 봉분의 좌측에 약간 떨어져 설치되어 있고, 봉분 앞으로 근래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묘비는 지대석과 비신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대석은 땅 속에 대부분 묻혀 있다. 비신은 윗면은 호형(弧形)으로 다듬었는데 전면에는 총탄을 맞은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이밖에도 비신 곳곳에서 이끼와 지의류에 의한 피해가 확인되고, 곳곳이 마모되었으나 글자의 획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The Tombstone of Shin Maeng-gyeong, Danyang is located on a ridge about 50 meters south of the Seniors Center in Hyeoncheon-ri, Danyang-eup, in the vicinity of the cemetery of the Pyeongsan Shin clan. Shin Maeng-gyeong (courtesy name: Baeksang; pen-name: Ungye; family clan: Pyeongsan) was born in Bukpyeong-ri, Danyang and served as a magistrate of Jecheon. A commemorative pavilion and stele were also built in Bukha-ri, Danseong-myeon, Danyang-gun to honor Shin’s filial devotion and great loyalty to the country. The tomb of Shin Maeng-gyeong is a joint tomb in which his wife, a member of the Chirwon Yun clan, was also laid to rest. The tombstone is positioned slightly to the left of the mound, in front of which stand a stone table and an incense table, which are thought to have been erected there in more recent times.
<후면> 효자 제천현감 신공 묘표 단양은 오지이다. 구름과 바위의 마을로서 산수가 빼어내 내가 그를 사랑하여 늘 그 사이를 거닐었다. 하루는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다 북평촌이란 마을에서 쉬었는데, 작은 누대가 물가에 있었고 향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마치 은자가 거처하는 곳 같았다. 마을 늙은이들에게 고하니 모두 말하길 “이곳은 독신할 효자 신공의 집이 있는 곳이며 지금도 그 손자 익겸씨가 삼가 그 집안을 지키고 있어 고을 전체가 추대를 한 까닭”이라 하였다. 내가 찾아가니 참으로 정성스러운 장자다운 인물이었다. 나에게 읍을 하고 올라와 옷깃을 여미며 말하길 “우리 할아버지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등창을 앓고 있을 때 입으로 빨아내었고, 또 십년 동안 병 시중을 하면서 밤낮으로 허리띠를 풀지 않았습니다. 상을 당하여 몸을 훼손할 지경에 이르도록 여막에 거처하며 죽만 마시고 소금이나 채소도 먹지 않기를 3년을 하루 같이 하였습니다. 또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 변을 맛보고 길흉을 살폈으며 의원이 고슴도치 고기를 먹으면 족하다고 말함에 구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어서 들판에서 울고 있는데 홀연히 고슴도치가 달려오니 이를 가지고 나아가니 병이 곧 나았습니다. 후에 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약에 타서 회복시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두 아우와 한 집에서 거처하며 우애가 매우 극진하였으며 분가할 때에 이르러 그 재산을 덜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으며, 또 그 사람이나 땅도 좋은 것을 골라서 주었습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려토록 하니 그 실적이 삼강속록에 실려 있으니, 군수 창석 이공 준이 편찬한 읍지에 그 일이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말하길 세도가 쇠미해지고 교화가 해이해져서 백성이 행동을 따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뜻밖에 왕상과 설포가 이 곳에 다시 태어났었구려”라고 하였다. 익겸씨가 또 말하길 “우리 할아버지는 몸가짐이 엄숙하며 타인의 잘못을 보면 마치 장차 자신이 더러워지는 듯하였습니다. 광해군 시기에 폐모소에 참여한 사위가 하나 있었는데, 후에 등제하여 영예롭게 돌아왔으나 문을 닫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 소애한 여자가 있어 몰래 살펴보며 사모하였는데, 그 어미가 일찍이 밤에 몰래 찾아워 그로 하여금 천침하기를 청하였는데, 엄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만력 계와 갑년 해에 굶주린 자들이 모여들자 호구를 헤아려 먹여 많은 대중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들 중 양갈래 머리를 하고 바가지를 쥔체 울면서 종신토록 복역하겠다고 간청하였는데, 말이나 용모가 범인과 달라 집안에 거쳐하게 하여 사내 종들을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후에 그 가족을 구하여 돌려보내주니 과연 양가의 달이었다고 합니다. 아, 우리 할아버지의 덕과 선행은 반드시 이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만 제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자세히 알 길이 없고, 마을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얻은 것이 겨우 이러한 몇몇 일에 불과합니다.”라고 하니, 내가 또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것이 공에게는 진실로 하찮은 일이지만 모두 후인의 법식으로 삼기에 족한 것이니 마땅히 민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수년이 지나고 익겸씨가 비기를 우암 노선생에게 여쭙고 마을에 세웠으며, 또 몇 해가 지나 나에게 일러 말하길 “묘가 황량한 산과 빈 골짜기에 있으며 묘표가 있지 않아 후세에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지금 장차 몇 자되는 비석을 세우니 선생께서 글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사례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내가 늦게 태어나 비록 공의 문하에 빗질은 못하였지만, 그 명성을 들음에 격앙됨이 깊거늘 이에 탁명을 한다면 영예로룸이 있겠다 하여 마침내 그 세계와 이력을 모아
<좌측면>서술하여 말한다. 공의 휘는 맹경이며 자는 백상이고 호는 운계로 원주 사람이다. 그 선조는 신성부원군 찬이며, 찬이 승지를 지낸 거의를 낳고 거의가 찰방을 지낸 지안을 낳았으며, 지안이 첨정을 지낸 숙륜을 낳았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되신다. 증조 희철은 생원이며 조부 응서이고, 아버지는 개복으로 직장이며 어머니는 선산 백씨로 주부를 지낸 형의 딸이다. 공은 가정 경술년 2월 3일에 태어났으며, 효행으로 처음 서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나아가지 않고 다시 사직 참봉이 됨에 곧 명을 받아 여러번 관직에 제수되어 한성과 제천 현감이 되었다. 뒤에 창녕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나이 72세인 천계 신유년 6월 6일에 집에서 졸하였으며, 군의 동쪽 율현의 부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윤씨가 부장되었다. 윤씨의 아버지는 건이고 증조는 석보이다.
<우측면> 홍문관 직제학 벼슬을 지냈다. 자식은 모두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과 작이고 딸은 장녀로 문과에 급제한 김이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허강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신상복에게 시집갔다. 측출 자식으로 윤, 낙, 환이 있다. 진의 아들은 수겸이며, 작의 아들은 호겸, 익겸이다. 서손 상원은 윤의 소생이고, 창립, 창원, 창세는 낙의 소생이며, 효성, 필성은 환의 소생이다. 효성은 무과에 올라 절충만호가 되었다. 안과 밖으로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다 실을 수가 없다. 명하여 말하길 깊은 저 단산은 구포가 날개를 펼치는 곳이라네 둥글고 볼록한 곳은 효자의 무덤이라네 그 뼈는 이그러질지라도 그 명성은 향기롭다오 내가 명하여 후세에 알리노니 영원토록 감히 훼손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