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영 선생(李敎英 先生 : 1890.12.~1976.03.)은 하늘이 내린 효자로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진천군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모친이 병환으로 위급해지자 1931년 4월 10일 왼쪽 장지를 끊어 모친께 수혈해 드렸고, 병이 재발하자 그해 5월 왼쪽 무명지를 끊어 다시 수혈하여 모친의 수명을 연장 시켜 드렸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도 1년 동안 시묘하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또한 부친이 중풍으로 4년여를 병석에 있을 때에도 병수발을 직접 하였으며,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더 이상 시묘를 절대 하지 마라”라는 유언으로 부친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조석으로 성묘를 하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각계각층의 기관장, 향교단체, 성균관, 지방유지, 군민들은 선생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를 오랜 기간(1930년대~1960년대)에 걸쳐 약 123편을 기록하였으며, 선생의 효행의 행적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진천군 명암면 백곡리에 효자비(1956년)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진천군 명륜회장 표창장(1934년), 충청북도 향교재단 이사장 표창장(1949년), 충청북도 도지사 표창장(1957년)으로 이어졌으며, 우리 지역내에서 뿐 아니라 동아일보(1931년), 조선일보(1956년)에서도 선생의 효(孝)에 관한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 특히 성균관의 유교철학을 따르는 진천향교 전교 및 진천군 유도회 지부장을 역임했던 김만희가 1963년경 선생의 효행에 관한 여러 기록을 한데 모아 필사할 것을 처음 제안하였고 진천향교에서 효행록을 필사하였다. 그에 이어 1965년경 진천군 유도회 회장 신경철은 행장편을 책자로 엮었다. 이교영 선생은 효자(孝子)의 칭호(稱號)에 이른 것 외에도, 보름마다 진천향교에 다니며 유교사상을 배우고 충효와 예절,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몸소 실천하였고, 일제강점기의 단발령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의지로 평생 머리를 깍지 않은‘유일한 상투 할아버지’로 남아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였으며, 6.25 사변을 겪으며 모든 학교가 휴교될 때 훈장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와 서당을 차려 글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삼경(四書三經), 통감파(通鑑派) 등을 약 10여 년간 가르치게 하였다. 이러한 이교영 선생의 충효사상(忠孝思想), 선비정신(士精神/儒家精神), 애국정신(愛國精神), 교육방침(敎育方針)은 근대 시기를 떠나 전 시대와 사회를 넘어 역사적·교육적인 가치를 가지며, 약 123편에 이르는 방대한 한자(漢字) 기록물들은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서 지식문화의 연속성과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학술적 가치로도 그 의미가 크다. ◦ 특히 효행록을 포함한 5권의 고문헌 및 고문서의 작성 주체가 중앙의 성균관, 지역의 진천향교, 진천군 유도회와 같은 유교 정신을 따르는 조직단체에서 출발하여 충청북도, 진천군이라는 지방자치단체 뿐 아니라 군민들이 함께 추앙하고 뜻을 모아 기록하여 남긴 것으로, 이는 지역 공동체적 의미와 사회 공동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차별성 있고 희소성 있는 공적(公的)인 사료(史料)로서, 근대 시기의 우리 지역사 연구와 우리 민속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 될 수 있는바 충청북도 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고자 한다.
문화유산 상세정보
제 0011 호
등록문화유산 > 기타 > 동산
사회생활 > 사회제도 > 문서 > 사문서
근현대
진천군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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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예술, 사회, 경제, 종교, 생활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